시대의 화가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2014. 7. 19. 02:15카테고리 없음

 

 

 

 

 

 

 



 

 

 1

 

서설홍청(鼠囓紅菁, 쥐가 홍당무를 파먹다)
18세기, 지본채색, 20 x 19 cm, 간송미술관 소장
 
 
 
 




2

최북(崔北)의 금강전도 (金剛全圖)

조선 후기의 화원 정선(鄭敾)이 진경산수(眞景山水)를 그리는 데 즐겨 사용했던
수직으로 죽죽 그어내리는 독특한 형태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뾰족한 봉우리나 암산(巖山)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기법이다.
최북 역시 첨필(尖筆)의 수직준을 힘있게 반복·구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산천을
개성있게 조형해냈다.
특히 금강산 골산(骨山)의 외형적 특징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3

표훈사도(表訓寺圖),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38.5 x 57.5 cm, 한국 개인소장

금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일종의 평원산수법(平遠山水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4

초옥산수(草屋山水)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 종이에 수묵담채, 31 x 36.1cm,개인소장

그림 왼쪽 위에는 '빈 산에 사람이 없으나, 물이 흐르고 꽃이 피네(空山無人 水流花開)'
라는 왕유(王維)의 시에서 따온 화제(畵題)가 흘림체로 씌어 있다.
화면 오른쪽으로는 초가 지붕을 얹은 소박한 정자와 나무 몇 그루가 서 있고,
왼쪽으로는 작은 폭포를 이루어 흐르는 계곡이 그려져 있다.
정자와 나무는 담묵의 필선으로 간략하게 묘사하고,
반면에 계곡 부분은 겹쳐 바른 농묵과 담청을 덧칠하여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5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지본담채, 66.3 x 42.9 cm, 개인소장

눈보라 치는 겨울밤 집으로 돌아가는 한 나그네와 동자의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허리가 구부정한 한 나그네가 힘없이 걸어가고 있다.
낭만적 서정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며, 사립문 옆 마른 나무들이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에 쓸리고 있는 부분과 나그네를 향해 사립문 밖까지
나온 개가 짖는 모습이 보인다.
힘 있는 필치로 묘사되어 있으며, 거친 선과 나무 밑의 거칠게 표현한 점들이
최북의 성격처럼 힘 있고 날카롭게 느껴지는 동시에 짙은 서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
일모창산원 천한백옥빈
시문문견폐 풍설야귀인

날은 저물고 푸른 산 아득한데
찬 하늘 눈 덮인 집은 쓸쓸하기만 하네
사립문 밖엔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눈보라 치는 밤 길손은 돌아가네

유장경(劉長卿), <봉설숙부용산주인(逢雪宿芙蓉山主人) 중에서







6

조어산수(釣魚山水),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족자 종이에 담채, 66.3 x 42.9 cm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 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 등
중국에 잇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7

답설방우 (踏雪訪友) : 눈을 밟고 벗을 찾아가다
지본담채, 25.5 x 31.5 cm, 간송미술관 소장
수북히 내린 눈길을 헤치고 시골에 은거한 친구를 방문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
한겨울의 차가운 추위를 그린 것은 최북의 험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8

산수도(山水圖) 지본담채, 28.7 x 33.8 cm, 고려대학교 박물관

却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세상 사람 다투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모두 막았다네.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그린 그림이다.
지면을 대각선으로 절반씩 나누어 놓은 계곡의 물줄기는 호쾌하기 그지 없다.







9

낚시하는 노인






10

화룡도(化龍圖) 지본수묵,55cm x 32.5cm, 개인 소장  

이 작품의 화제에 쓰인 葛陂化龍(갈피화룡)은 칡이 있는 언덕에서
용이 오르는 모습을 보는 광경으로 작품의 의미와 적절한 조화가 이루어져 있다.
간결하면서도 여백의 미를 살린점을 볼 수 있으며,
작품속의 인물의 심정이 용이 오르는 모습에 베어 있는 듯 하다.







11

누각산수도(樓閣山水圖)

구도에 힘이 있고 변화가 많아 역동감이 있다.
화제 또한 깊이를 더해준다.
" 평생을 산간벽지에 사니 사립문은 좁고,
초여름 강물은 깊은데 초가 누각은 쓸쓸하네."







12

최북의 난(蘭) - 그 부드러움과 유연함







13

맹우도(猛牛圖),  지본채색, 24.2 x 32.3 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힘차게 고개를 위로 쳐들고 물을 건너는 황소와 그 위에 채찍을 두 손으로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을 꾸부린 목동으로 전체를 채운 간결한 구도의 그림이다.
물결의 무늬나 짐승의 털을 그리는데 있어 사실적 기법의 의도가 보이나
소털 하나하나의 올을 매우 굵게 그려 사실감이 많이 감소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그림은 소의 힘찬 운동감이나, 두 눈 사이가 아주 멀어서 대단히
해학적(諧謔的)으로 보이는 목동의 얼굴 등 매우 재미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14

수하독서도(樹下讀書圖)
견본담채, 26.1 x 21.5 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15

최북. 메추라기. 견본채색, 24 x 18.3cm,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최북은 여항화가이다. 여항화가란, 화원도 아니고 사대부도 아닌,
중인, 평민, 천민의 신분으로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을 말한다.
호생관은 단원 김홍도처럼, 스스로 선비의 격으로 살다간 사람이다.  
전면으로 베어나오는 맑음과 고상함이 있다.
한국 그림에서 간취되는 전형적인 동심을 간직한 분위기가 있다.  







16

[메추라기와 조]...종이에 담채.17.7x27.5cm

메추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라기라고 불린 "최북"







17

기응탐토(飢鷹耽兎)

화폭 우측 괴석이 있고 그 뒤로 큰 나무 한그루가 대각선으로 뻗어있다.
나무에 앉은 매 한마리가 다급하게 뛰어가는 토끼를 노려보고 있다.







18

토끼 33.5 x 30.2 cm

조선시대(18세기) 최북의 작품 <토끼>에는 잔 풀이 난 평지에 토끼가 한 마리
동작을 멈추고 앉아있다. 토끼의 형태는 과장됨이 없고, 야생 토끼의 거친 듯
하면서도 윤기있는 질감이 촘촘한 선묘에 의해 자연스럽게 살아나 있다.
튼실한 토끼의 표현에 충실하려 한 꼼꼼한 묘사력이 돋보인다.






19

해도(蟹圖)

단오날 갈대에 올라 그네를 타는 게 그림
게는 갈대에 올라 짝짓기를 하는데 암수를 농묵으로 처리하여
사실감있게 그렸다





 

20 


국화(菊花)



                       시대의 화가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


                       최북은 조선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
                       스스로 호를 '호생관'이라 칭하였는데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최식(崔埴)이었으나 스스로 이름을 최북(崔北)이라고 개명을 하고 북(北)자
                       를 둘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하엿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메추라기라고도 하였으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崔山水)로도 불렸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기이한 그의 성격을 알 
                       수있는 대표적인 예이다.김홍도·이인문·김득신(金得臣) 등과 교유하였다.
           
                       최북은 1712년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최북은 키가 작았고 눈이 하나 멀어서 항상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최북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은 지체 높은 이의 모욕을 받게 되어 분을 이기지 못해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버렸다고 한다. 

                       출신 성분이 낮았던 최북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사대부 중심에서 일반 서민 사회로 변화하는 
                       문예부흥기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천민 출신인 화가가 서야 할 자리는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 
                       할 수밖에 없었다.
                       최북의 그림은 초기 남종화풍의 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 진경산수화로 바뀐다. 
                       천하에 놀기 좋아하고 구속 받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국내의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중국까지도 다니면서,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당시의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삶의 각박한과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의 일화로 남겼다.

                       그는 산수화는 물론 화훼, 영모, 괴석 등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취미가 다양하여 책읽기와 시 짓기를 좋아한 시·서·화 삼절의 화가였다.
                       최북의 작고연도는 정확치 않다.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 설과 75세인 1786년 설이 
                       있는데 1786년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은 것을 생각 할 때 올해는 탄생 293년 서거 219년이 되는 
                       해이다. 200여년 전 사회의 변혁기에 그림이란 학문을 통해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고자 했고, 가난하지만 자연과 함께 살아간 최북은 시에도 뛰어났으며 작품에 
                       수각산수도(水閣山水圖), 한강조어도(寒江釣魚圖), 풍설야귀도(風雪夜歸圖), 표훈사도表訓寺圖),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 등이 있고 약 80여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최북이 죽고 난 다음에 한 유명한 시인은 이렇게 썼다.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초구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은 뉘 집 자제인가? 
                       너희들 멋대로 거들먹거리다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최북은 비천하나 정말로 애닯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날카롭고 사나와서 
                       스스로 화사 호생관이라 했지 
                       작은 몸집에 한 눈이 멀고 
                       술이 석 잔이 넘으면 거리낌이 없도다 
                       북쪽으로 숙신까지 갔었고 흑삭도 거쳤으며 
                       동쪽으로 일본에 들어가 적안을 지났다네 
                       귀한 집 병풍의 산수도에서 
                       견과 이징을 모두 쓸어 없애 버렸네 
                       술 찾아 마시며 미친 듯 노래하고 비로소 붓을 놀리면 
                       높은 마루 밝은 해에 강과 호수가 생겨나네 
                       열흘 동안 굶주리다 그림 한 폭을 팔고는 
                       몹시 취해 밤길 가다 성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묻노라, 북망산의 진토된 만인의 뼈 
                       어찌하여 최북은 세 길의 눈 속에 묻혔는가? 
                       아아, 최북의 몸은 비록 얼어죽었지만 이름은 사라지지 않으리.  

                       (崔北歌(1786)<최북을 노래하다> 신광하申光河 (1719 - 1796)



                       최북의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은 손으로 그렸다? 
                                 -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린 사연은?! 

                       최북의 ‘눈보라 치는 밤 돌아오는 사람’ 을 그린 걸작,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화가는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눈 오는 밤을 거칠고 강하게 묘사하였다. 그런데 
                       풍경 속 군데군데에서 붓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믿기 어려운 것들이 발견되는데... 
                       꺾일 듯한 나무의 흔들림과 설산의 흐릿한 윤곽선. 그리고 앙상한 나무의 표현은 
                       지두화(指頭畵)의 전형적인 특징! 최북은 붓 대신 손가락과 손톱에 먹물을 묻혀 
                       겨울밤을 표현한 것이다. 조선의 백과사전인 ‘임원경제지’ 에도 최북이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북이 보여준 기인의 면모(뜨거운 열정)는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에 잘 
                       나타난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렸다. 
                       그림 속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가는 나그네가 
                       화가 자신의 모습은 아닐까. 최북의 거침없는 성격과 고달픈 인생이 묻어나는 
                       작품, <풍설야귀인>을 재조명한다.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를 살다간 우리나라 화가 중 최고의 기인 호생관 최북
                       (毫生館 崔北, 1712-1786?)은 스스로를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범상치 않았던 최북은 또한 자신의 이름 ‘북(北)’ 자를 반으로 쪼개어 
                       ‘칠칠(七七)’ 이라고 불렀다. 당시 중인계급의 미천한 출신이지만 그림을 잘 그려 
                       명성을 얻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엄격한 신분제에 대한 
                       반항심과 화가로서의 자존심, 술과 기행으로 ‘미치광이’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최북은 송곳으로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눈이 됐다. 
                       고흐는 정신병 때문에 귀를 잘랐지만 그는 맨 정신에 송곳으로 눈을 찔렀다.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는 최북의 대표작 중 하나로 삶의 궤적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기행과 광기, 거침없는 그의 기질이 잘 나타난다. 그림은 물론 화제의 
                       필체도 파격적이다. 제목 그대로 눈보라 치는 겨울 밤에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린 
                       작품이다. '지두화(指頭畵)'다. 손가락과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것이다. 

                       흰눈에 덮인 산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로 봐서 을씨년스런 분위기다. 
                       사립문 밖 개 짖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하모니를 이루면서 쓸쓸한 겨울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킨다. 나뭇가지의 쏠림으로 봐서 눈보라가 거칠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며 종종걸음으로 귀가하는 동자와 나그네는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광풍이 그림 밖에까지 미쳐 을씨년스러움을 더한다. 




                      



 

 리처드 2012.03.21 21:28:58 | 조회 : 4491

 

이서종
엄청난 내면의 힘을 격정적으로 힘있게
표현한 최북의 천재성에 감탄합니다. ^L^

2012.03.22 (16:43:04)

 
리처드
이서종님,

국립전주박물관, '호생관 최북' 탄신 300주년을 맞아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문인의식을 갖춘 그를 재평가 하는 전시회가 있다합니다

museumnews 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곽동석)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직업 화가인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년 경)의 탄신 300주년을 맞아 5월 8일부터 6월 17일까지 기획특별전 “호생관 최북”전을 연다. 최북을 주제로 한 최초의 특별전인 이번 전시를 위해 그의 주요 작품과 기록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탄신 300주년을 맞아 그림 뿐 아니라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던 문인의식文人意識을 갖춘 18세기의 지식인 화가로 그를 재평가해보고자 한다.

전시는 총 3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1부는 ‘거기재居其齋: 내가 그곳에 있었다’에서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를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을 갖춘 독보적인 존재라 일컫고 당당한 예인의 자긍심을 가졌던 화가 최북에 대해 다룬다. 특히 이 장에서는 처음으로 특별전에 선보이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유곡후동도>가 2주 간 선을 보인다. 2부는 ‘호생관毫生館: 붓으로 먹고 산다네’는 ‘최산수’, ‘최메추라기’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산수·화조·영모 등 다양한 장르의 화목畵目을 능숙히 다루었던 최북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인다. 8면에 펼쳐진 ≪사시팔경도첩四時八景圖帖≫은 직업 화가로는 일찍이 남종문인화풍을 구사하였던 최북의 특출한 기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표훈사도表訓寺圖>는 평생 조선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였던 최북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3부는 ‘화폭에 내 마음을 비추다’에서는 중년기 이후 유명한 시구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시의도詩意圖들을 통해 자연과 함께 안빈낙도의 삶을 바랐던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바로 조선시대 문인들이 추구했던 이상향으로, 최북이 단순히 그림만 잘 그렸던 사람이 아니라 시서화 삼절을 겸비하고 문인의 기품을 갖춘 18세기 말 지식인 화가였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11번째 맞이하는 ‘전북의 역사 문물전-무주’편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도 한 이번 전시는 국립전주박물관에서 꾸준히 개최해 온 지역 문물전을 지역의 인물을 주제로 풀어보고자 하였고, 그 주인공이 무주 최씨인 최북이다. 모쪼록 이번 특별전을 통해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 최북의 예술 세계와 작품 활동은 물론이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2012.05.15 (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