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피던 날에 / 천숙녀 詩選

2022. 3. 8. 17:36카테고리 없음


산수유 피던 날에 / 천숙녀 ​한나절 보슬비에 촉촉이 젖는 맨땅 감은 듯 뜬 눈 사이 봉오리 마구 터뜨려 어둡던 산자락 가득 잔설 녹는 웃음소리 ​ 뜻 모를 귓속말은 가슴으로 풀어내며 아지랑이 여울 찍어 옷자락 물들이다 스치는 바람에 그만 살 오르는 그리움 산수유꽃 필 무렵/곽재구 시 한보리 곡 복수초 / 천숙녀 ​ 무던히 소란 하던 즈믄 해 잔치 끝 뿌리를 못살게 군 모진 바람 폭풍 한 설 이른 봄 잔설 헤집고 피어나렴, 복수초야 몽돌 / 천숙녀 ​ 처음부터 둥근 상像 몽돌은 아니었다 ​ 이리 저리 휘둘리며 단단한 몽돌로 굴러 ​ 걸쭉한 땀방울들이 몸져누운 한 세상 비탈진 삶 / 천숙녀 ​ 일손 끊긴 가장들 눈 자위 붉어졌다 삶은 늘 비탈 져서 뒤뚱이며 걷는 걸음 목메어 생 목 오르고 쉰 물까지 토해내고 ​ 올 올마다 깊숙이 낡은 지문 묻어있다 무릎 기어 오르는 강 시린 관절 앓다 가도 속 깊은 상처 따위는 스스로 꿰매 덮는다 무지개 뜨는 / 천숙녀 아등바등 걸어 온 길, 돌아보니 일탈逸脫이야 오기와 과욕 가슴에 품고 발바닥 닿도록 누볐을까 여태껏 아랫도리 감싸 줄 옷 한 벌 장만하지 못했는데 해지는 서창 하늘엔 노을이 붉다 비바람에 할퀸 자국 흥건히 고인 땀내 맨 땅 위 공허로 쳐질 파도 짓 수채화여 세차게 불어 온 폭풍 잠들 날 있을까 햇살 나붓이 반겨 으깨진 상처 쓰담아주는 하늘에 마른 하늘에서도 일곱 빛깔 무지개 뜨는 침묵沈黙 / 천숙녀 ​ 응달에서도 숨을 죽인 동면(冬眠)을 일깨우면 ​ 지축(地軸)을 뚫고 걷는 푸른 새싹 있어 ​ 파란 꿈 촉심을 뽑아 물레를 잣고 있다 2월 엽서 1 / 천숙녀 뼛속 시린 얼음장 소리 내어 웁니다 불면의 긴 밤 쩌억쩍 갈라져 ​ 영혼의 깊숙한 골짜기 환한 창 열립니다 2월 엽서 2 / 천숙녀 ​ 깨어날 생명들이 뒤척이는 뜨건 몸짓 차디찬 얼음덩이 굴착하는 산울림에 개울가 버들강아지 터지는 눈 웃음 좀 봐 ​ 찬바람 희끗희끗 도망치는 뒷걸음질 시샘의 꽃샘추위 받아 쳐 직립하며 햇살과 어우러진 몸살 움틔우는 부활을 봐 우수 지나 경칩 되니 / 천숙녀 ​ 봄보다 먼저 내게 시가 되어 안겨왔네 겨드랑이 가렵더니 눈빛 환히 맑아 졌어 각질이 벗겨 졌나 봐 세포마다 피가 돌아 봄 소식 하나에도 시가 있고 노래 있어 노래하는 여울 되고 춤추는 강물 되어 마침내 바다에서 만나 꽃 울음을 만들겠네 아는 가 예쁜 내 님 나도 그대 시가 되어 그대 향한 긍률한 밤 가슴 치는 뜨거움 해 맑고 건강한 인연 사는 날까지 이어지길 삼월 / 천숙녀 삼월은 가슴마다 파문으로 번져왔어 기미년 퍼져가던 만세 소리 외쳐 보자 닭 울음 여명을 쫓아 튕겨 오르는 빛 부심을 ​ 꽃 한 송이 피웠었지 총 칼 앞에 태극기로 칼날 같은 눈초리 들 맨 땅 위에 박아 놓고 선혈 꽃 기립 박수로 한 겨레 된 우리잖아 ​ 겨울의 긴 잠 끝 봄빛으로 깨어날래 울리는 종소리에 새 날의 문을 열고 앞뜰을 정갈히 쓸고 돗자리 펼칠 거야 실 바람 / 천숙녀 ​ 누군가 빈 방에 물 빛 벽지 바르네 두터운 창 가르며 눕는 저 달 모습으로 성심껏 동양화 한 폭 그려주고 있었네 ​ 질 긴 목숨 하나 끌고 밀어 당길 때 저무는 언덕에서 불사르는 그대 손길 그리움 화음으로 받쳐 불러주는 노랫소리 ​ 하늘을 씻고 닦아 물소리 심겠다 마주 보아 가슴 치는 실 바람 이름 얹어 외줄 의 쓸쓸한 허기 시(詩) 한편을 빚겠다 언 강 / 천숙녀 어금니 내려앉아 잇몸이 부풀었다 ​ 무디어진 입맞춤은 언 강을 건너가고 ​ 쉼표를 눌러 찍었다 독한 기억이 묻혔다
나는, 늘 / 천숙녀 ​ ​ 철커덕 철커덕 씨줄과 날줄을 잇는다 ​ 침묵이 가슴으로 흐를 때 얇아지는 기억을 들춰 ​ 반쪽 잎 부비고 살자 뿌리 서로 옭아맨다 찔레 향기 / 천숙녀 ​ 걸음마다 밟히는 유년 고향 길 촘촘히 깔아 놓은 뭉게구름 피어나고 골마다 찔레 향기가 그득 했던 엄마 냄새 앉은 뱅이 경대를 단정히 꺼내 놓고 가을볕이 좋다 시는 엄마를 앉히셨다 얼레빗 머릿결 쓸며 곱게 빗고 계시네 따스한 풀 방석이 지천에 펼쳐있어 서로에게 무엇이 될까 깊어지는 조화 속에 쉼 없이 길 없는 길 위를 걷고 계신 우리 엄마 이제야 / 천숙녀 두 가슴 엉키어져 이제야 집을 짓는 옹이로 맺힌 숨결 눈 부처에 갇혀 울어 시간을 포개고 앉은 햇살들 일어났다 ​ 드리운 품 안에서 새 순으로 날개 돋는 귀 세우며 열어 놓은 젖어 있는 문고리 열 오른 이마를 짚는 네 손 있어 환했다 ​ 이랑 따라 쟁기질 쉼 없이 갈아엎고 가파르게 내 쉬던 들 숨 날 숨 갈 앉히며 둥그런 마음 닮고 싶어 보름달을 그렸다